1939년 매해튼으로 이사했던 시인 오든은 당시 이미 훌륭한 작가였다. 그는 어린 시절 믿었던 성공회 신앙을 버린 상태였다. 영국 지식층이었던 친구들도 대부분 신앙을 버렸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로 오든의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다시 교회로 돌아가 많은 사람을 충격에 빠뜨렸다.
어찌된 일일까? 그가 쓴 글에 따르면, 1940년 나치즘은 만인의 정의와 자유를 믿는 척조차 하지 않아 큰 충격을 안겨 준다. 그들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은 여자처럼 심약한 부류에게나 어울린다”라는 이유로 기독교를 공격했다. 게다가 “자유주의가 표방해온 모든 것을 나치즘이 전면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야만국도 아니고 유럽에서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축에 드는 나라가 미친 듯이 열광했다.”
교회에서 자란 오든에게까지도 기독교는 무용한 폐물로 여겨 등졌었다. 그런데 나치즘의 등장은 새로운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그가 인권과 자유와 해방을 믿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자연 세계의 작동 원리는 약육강식이다. 만일 강자가 약자를 이기는 것이 순리이며 지금의 우리도 순전히 자연적이고 자생적인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한다고 해서 왜 우리가 돌변하여 “그것은 틀렸다”라고 말하는가? 무슨 근거로 그럴 수 있는가? 아프리카 수단에서 강한 부족이 약한 부족을 ‘잡아먹는’ 인종 학살을 잘못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없다면 나의 정의관은 사견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나치즘을 비난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없는 한 오든은 내 감정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보다 정당하다고 말할 권리가 없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가치는 가공의 산물임을 깨달은 것이다. 회의론자 제자 나다나엘처럼 오든도 자기 시대의 ‘옳은 부류가 기독교를 비웃는다는 사실에 얽매여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지적인 의문-특히 도덕 가치의 기초에 대한 의문-에 답이 없었기에 기꺼이 예수님을 새로 보았다.
시인 오든(W. H. Auden)을 신앙에 이르게 한 논리를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lntyre)가 <덕의 상실>에서 제시했다. 매킨타이어는 사물의 목적(telos)을 모르고는 그것의 좋고 나쁨을 결코 분간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예컨대 그는 시계가 좋은지 나쁜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 시계의 목적을 알아야만 한다. 시계로 못을 박으려다가 시계가 망가지면 ‘나쁜 시계’라고 불평하는가? 물론 아니다. 시계는 못을 박으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시계의 목적은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는 것이다. 동일한 원리가 인간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지어졌는지 모르고서 어떻게 특정인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 수 있겠는가? 인간의 존재 목적을 알아야만 한다.
출처 : 팀 켈러, 인생질문, 두란노,41~44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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