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1~3절
결혼한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얻지 못한 부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중에 아이를 낳을 수 있으라는 생각에서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나 두 사람은 2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임신은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점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변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만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근심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서 사랑스러운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작은 생명이 가정에 가져다준 행복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아이가 없었을 때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지만, 두 사람은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하곤 했습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크게 나던 날부터는 가정에 매일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성장해가는 작고 신비롭고 연약한 이 생명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덩실덩실 춤추지 않았을까요? 무려 100세에 낳은 아들이고, 적어도 25년을 꼬박 기다려 이삭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아브라함의 노년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콩나물 자라듯, 이삭은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어느 날은 엄마 아빠를 부르더니, 혼자서 걷다가 뛰기도 하고, 집에 친구를 데려오기도 했을 것입니다. 10대에 접어들면서 제법 아버지 어깨만큼 키가 자랐고,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아 크고 빛나는 눈을 가진 열혈 청년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삶의 지혜를 조금 더 배우고, 좋은 처자를 만나 가족을 이루는 일. 그리고 죽기 전에 아브라함 품에 손주를 안겨주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 귀한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창세기 12:2)."』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과거에 시골에서 자란 이들은 부모님의 농사를 돕는 일이 많았습니다. 집안일을 돕는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지게를 지거나 경운기를 몰고, 바쁜 아버지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를 다녀오기도 합니다(천성적으로 약골인 사람도 있기도 합니다). 쉬는 날이 많은 오월에는 모내기를 돕습니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면 왜낫으로 논둑을 베어야 합니다. 추석을 전후해서 비라도 오면 미처 탈곡하지 못해 논에 눕혀 둔 벼가 썩지 않도록 뒤집어 주는 일에 명절을 다 보내야 합니다. 검붉은 피부에, 굵은 손마디며, 여기저기 불쑥 솟아난 건강한 힘줄이 보기에 참 좋습니다. 크고 작은 짐을 지거나, 지게를 지고 겨울 땔감용 나무를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거친 산에서 가져온 굵은 장작을 톱으로 자릅니다. 가끔은 손잡이에서 빠져나가기도 하는 무거운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지런히 모아 쌓으면 겨울 준비가 끝납니다. 요즘 농촌 풍경은 많을 바뀌었겠지요.

어느덧 십 대로 성장한 이삭은 아버지보다 키가 컸을 것입니다. 이삭은 어느덧 장성한 청년으로 자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합니다. 자식을 주실 때는 언제고, 지금은 다시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을 읽어본 분들은 하나님이 ‘인신제사’를 아주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는데, 아버지 손으로 아들을 바치라니요? 그런데 왜 이런 명령을 하셨던 것일까요? 생각이 깊은 어른들의 마음을 어린아이들이 잘 알 수 없듯, 하나님의 뜻도 가늠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번 일은 너무 큰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그 이유를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풍파를 헤쳐 온 나이 많은 아브라함에게도 이 말씀은 쉽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마주한 여러분이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행히 성경은 혼란스러운 우리를 배려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생명을 바라셨던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빼앗을 생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전래동화 심청전에는 딸 심청의 지극한 효(孝)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심청은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말에 기꺼이 생명을 내놓는 착한 딸이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이 일을 알았다면, 죽음으로 달려가는 딸을 끝까지 말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부녀의 이야기 뒤에는 잔혹하고 씁쓸한 일도 있습니다. 인당수에 처녀를 바치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이 그것입니다. 뱃사람의 안전을 위해, 그들의 부와 성공을 위해 사람이 산 채로 희생되는 이야기는 의외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효(孝)’라는 유교적 가치에 철저하게 가려진 것입니다. 산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화를 푸는 미개한(?) 신(神)과 성공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탐욕 이야기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그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좋은 것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착한 동기 덕분에 심청전은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신제사든 인신공양이든 그 자체로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고귀한 가치를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그런 일마저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애초부터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신뢰’였습니다. 아브라함을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때에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많은 나이임에도 아들을 주겠다는 그분을 신뢰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믿음과 신뢰, 확신만큼 아브라함을 괴롭힌 것들도 있었습니다. 사람이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 순간순간의 의심과 흔들림, 두려움이 그를 둘러싸 어쩔 줄 몰라 하던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듯, 확신과 신뢰에 찬 그의 모든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댄 것이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은 그의 전부였고, 미래였으며,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릴 위험에 노출된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싫어서라든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작아져서가 아닙니다. 이삭을 향한 마음이 너무나 크고 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커다란 저수지만 보는 사람은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샘물의 위대함을 잊기 쉽습니다. 거대한 강과 넓은 호수에 가득한 물은 작은 샘에서 솟는 작은 물이 없이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옹달샘 아래, 그 저편에 있는 깊은 땅속의 흐름이 지표면으로 솟아올라 모든 것에 활력을 공급합니다. 그렇듯 잘 보이지 않는 깊은 산속 작은 샘과 땅속에 유유히 흐르고 있을 측량할 수 없는 물처럼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가 사는 온 땅에 가득합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 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릴 때가 있습니다. 살다 보면,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을 때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을 잃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졌던 처음 마음, 처음 사랑을 잊어버리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거대한 현실 앞에서 침묵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묵묵히 들어봅시다. 세미한 주님의 음성이 곧 들릴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바다 속 깊은 곳에 있는 물 근원에까지 들어가 보았느냐?
그 밑바닥 깊은 곳을 거닐어 본 일이 있느냐?
- 욥기 38: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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