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1~34절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삭, 이름 그대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얻은 아들은 볼 때마다 그를 웃음 짓게 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나이, 사람의 경험과 상상력으로는 감히 생각해 보지도 못할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비록 젊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자식을 어깨에 두 다리를 걸친 채, 두 손을 높이 쳐들고 걷는 기분은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신뢰, 때로는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람이 마침내 만나게 된 아름다운 결과였습니다.
1절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니,」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지키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세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뤄집니다. 하나님은 사라를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장막 뒤에서 웃던 사라를 하나님은 이해하셨습니다. 사람이 본래 그런 존재임을 아셨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 약속에 얽매이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를 시작합니다. 막 태어난 아기가 안전하고 평안한 공간에서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춥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이아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고, 장성했을 때를 생각하며 여러 가지고 도울 일들을 고민합니다. 하나님이 그러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을 돌보기 위해 항상 우리를 당신의 염두에 두시고, 넉넉한 가슴에 두시는 분입니다.
이삭은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미 믿음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그의 몸에 하나님의 백성된 표시를 한 것은 평생토록 그 사실을 잊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표식은 세례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삭이 젖을 뗄 즈음 되었을 때, 우연히 이스마엘의 행동이 불쑥 도드라졌습니다. 거의 어른만큼 자란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희롱했기 때문입니다. 하필 그 광경을 사라가 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낳은 자식인데... 아이를 희롱하는 이스마엘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사라는 부리나케 아브라함에게 쫓아가서 이 사실을 말하고, 내쫓아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이야기에서 조금 벗어난 말이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하갈이 이스마엘을 가지게 된 계기를 만든 사람은 바로 사라 자신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삭이 없었다면, 이스마엘이 자기 자식이라고 우겼을지도 모릅니다. 이 일로 아브라함은 몹시도 괴로웠습니다. 둘 다 자식이니까.... 사라는 화가 났고, 아브라함은 해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면한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사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면, 이런 일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해결책처럼 보였는데, 갈등으로 번지고, 거기서 머물지 않고, 나중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협하는 가장 피곤한 민족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다리는 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아직 당신의 뜻을 바꾸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묵묵히 기다려야 합니다. 때로는 생각대로 일을 되지 않는 게 오히려 축복일 수 있습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에서 나옵니다. 『사랑은 바라고 믿고 견디느니라』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나님 신뢰하는 법을 배우도록, 가르쳐달라고,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면, 우리는 문제를 만들고, 해결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13절을 읽겠습니다. 「12.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들과 그 어머니인 여종의 일로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사람이 너의 씨가 될 것이니, 사라가 너에게 말한 대로 다 들어 주어라. 13. 그러나 여종에게서 난 아들도 너의 씨니, 그 아들은 그 아들대로, 내가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교통정리를 해 주시자, 결단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의 계획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이게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지체되지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 아브라함은 항상 아침 일찍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냈습니다. 대부분은 시간이 지체되는 만큼 주저되거나, 지켜내기가 힘든 일들이었습니다. 믿고 기도하고, 응답을 받았다면, 돌아보지 않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당신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는 믿고 맡기겠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하지만 하갈은 죽을 맛이었습니다. 쫓겨날 때 가지고 온 물이 바닥나자, 아이를 덤불 그늘에 앉히고는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죽어 가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이 여인이 울부짖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무심하게 내보내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니, 그저 모른체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어린 자식을 품에 안은 여인처럼 우리를 바라보는 분입니다. 그 증거가 17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하갈이 아니라 이스마엘의 울음소리입니다.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하나님의 ‘여리고 약한 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강한 용사시며, 가장 크고 놀라운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마음이 여리다는 게 상상이 되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아이 이스마엘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천사를 보내어 하갈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19~20절을 읽겠습니다.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하갈이 샘을 발견하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담아다가 아이에게 먹였다. 20.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 그는 광야에 살면서,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곁에 있는 샘이 보였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방금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눈인데 보이지 않던 샘이 보이는 건 무슨 일일까요? 하나님이 눈을 밝혀주시니, 하갈에게 살길이 열렸습니다. 혹시 앞이 보이지 않습니까? 혹시 너무 오래 어두컴컴한 터널과 어둠을 지나고 계십니까? 아무도 돕는 이가 없다고 한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기도 제목, 울음소리, 간구가 하나님께 상달될 때, 이런 역사가 일어나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참고로, 사막에서 물이 터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요즘으로 말하면, 석유가 땅에서 솟는 정도라고 말할 만큼 엄청난 사건입니다. 샘 곁에서 풀이 돋고, 과일이 자라고, 거처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이 샘의 의미는 생존, 살길을 확실히 열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샘이 물질적인 축복이라면, 진짜 축복은 20절에 나타납니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 아멘! 사실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정도의 배려와 돌봄과 축복을 주신 건... 상상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하물며,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우리일까요?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정말 형편없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쪼금만 믿어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서, 항상 마음 속은 불안해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확신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22~23절을 읽겠습니다. 「22. 그 무렵에 아비멜렉과 그의 군사령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을 도우십니다. 23. 이제 여기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나와 나의 아이들과 나의 자손을 속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 당신이 나그네살이를 하는 우리 땅에서, 내가 당신에게 한 것처럼, 당신도 나와 이 땅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비멜렉의 뜻은 ‘우리 아버지는 왕이시다’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의 맹주로 불리는 이가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요구합니다. 요즘으로 얘기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방인이라고 볼 수 있죠.
이방인이었지만, 아비멜렉이 전문가의 눈으로 딱 보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일이 여러분과 제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지나치게 평범에서 사람들에게 그리 중요한 존재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게 보인다는 거예요. 신기하죠? 다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삶도, 하시는 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그래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서로 싸우지 말자고 제안을 해 온 겁니다.
잠언 16: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
우리의 대적을 우리가 물리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고, 대적이 알아서 평화협정을 맺자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대적을 물리쳐 주셔서, 아니 그 이전에 대적으로 두렵게 하셔서, 우리가 주님의 사람됨을 보여주옵소서!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도 나그네 생활을 합니다. 이 힘든 나그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 역사가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계시다면, 가까운 교회로 가십시오. 그곳에서 진지한 자세로 하나님을 한번 만나 보십시오. 여러분이 살면서 하신 결정 중에 가장 잘한 일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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