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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하갈, 광야에서 주님의 천사를 만나다!

창세기

by 선한일꾼 2024. 9. 7.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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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6:1~16

 

아브람이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이주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세월은 흐르고, 몸은 점점 늙어가는데, 여전히 아브람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사래도 덩달아 조바심이 났습니다. 사래는 고심 끝에 기가 막힌 생각을 해 냅니다. 위기가 닥쳐올 때 여성들의 기지란 얼마나 반짝입니까? 하나님이 남편에게 자식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아브라함의 아들이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집트로 잠깐 이주했을 때 얻은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들여보내기로 합니다. 이런 움직임이 있어도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고, 남편 아브람도 만족하는 듯 보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사래가 의도한대로, 자신의 기가 막힌 아이디어와 탁월한 선택이 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하갈이 임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행복하고 즐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브람에게는 자식이 생겼고, 모든 일은 자신의 계획대로 척척 맞아들어가고, 결과는 확실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이를 갖기 위한 목적은 이뤘지만, 사래에게 근심거리가 생겼습니다. 아이를 가진 뒤로, 하갈이 자신을 깔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조선 시대 후궁들이 세손이나 세자를 낳으면, 기대가 등등했던 것처럼, 하갈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중전 사래가 이를 가만 두고 보지는 않았겠죠? 사래는 아브람을 찾아가 이 모든 상황을 말하고, 남편의 결단을 요구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못하지 못하고 날뛴 후궁 하갈을 궁에서 내보내든지, 사약이라도 한 사발 내리던지 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람의 묵인(默認)하에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견디기 어려웠던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망을 치게 됩니다.

 

7~8절을 읽겠습니다. 7. 주님의 천사가 사막에 있는 샘 곁에서 하갈을 만났다. 그 샘은 수르로 가는 길 옆에 있다. 8. 천사가 물었다.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갈이 대답하였다.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주님의 천사는 하갈에게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서 복종하며 살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도망쳤는데... 다시 그 무서운 주인 마님에게 돌아간단 말인가! 그런 하갈의 마음을 아셨는지, 천사는 복중에 있는 아이를 통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습니다.

하갈은 주님의 천사를 만난 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이의 우물)’라고 지었습니다. 하갈은 쥐 죽은 듯 살겠다는 마음을 먹고, 다시 아브람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아들을 낳아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때, 아브람의 나이는 86세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특이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아브람의 무책임과 묵인입니다. 아브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무책임한 행동을 합니다. 그는 사래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결정을 내립니다. 너무 오랫동안 자식이 없으니, 아브람도 마음이 흔들렸던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도 남자에 불과하기에, 아내의 권면을 선뜻 받아들였던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을까요? 어쨌든 집안에서 일어난, 자신과 아내와 자식에 관련하여 일어난 일을 아내 사래의 타오르는 분노에 맡겨버린 것은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하갈의 교만방자한 모습이나, 사래의 학대를 묵인하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언뜻 보아도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자식을 주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종은 주인을 깔보고, 주인은 자식을 낳아준 종을 학대하고, 아브람은 그것을 묵인합니다. 심지어 그 일로 하갈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도 일을 저지르고 나서, 책임지는 일은 머뭇거리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물어보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다면 그것에 대해서도 여쭙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아브람이니까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일단 저지르고,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부지기수니까요. 그래도 아브람 정도면... 그렇다는 거지요. 성경은 아브람의 연약한 부분, 믿음의 어머니 사래의 질투와 분노, 그 집안 사람 하갈의 어리석은 교만을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다. 사래도 그랬다. 그 집안이라고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저는 성경의 이런 모습에 종종 놀라곤 합니다. 그러고는 우리가 특수한 상황을 핑계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닥쳐도 하나님께 여쭈어보는 것만은 빠뜨리지 말자!” 다짐을 해보곤 합니다. 물론 다짐이죠. 늘 기도는 뒷전이라...

 

둘째, 주님의 천사의 등장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갈은 이집트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임신을 하게 된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 그냥 내버려둬도 될 것 같은... 상황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갈을 만나 도움을 줍니다주님의 천사는 하갈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여기서는 하갈에 대한 명칭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래의 종 하갈아 하갈이 사래의 종이라면, 사래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천사는 하갈에게 가야 할 곳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먼저 하갈은 사래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순종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주님의 천사를 만난 하갈은 그곳을 브엘라해로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는 주님 곁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아담이 그랬지요. 아담은 하나님과 약속한 자리를 떠났습니다. 주님이 무서워 숨어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시고, 여러분을 소중한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까? 아니면, 살다 보니 험한 일을 만나고, 그래서 지치고 피곤하고 힘들고 낙심되어 잠깐 다른 곳에 머물러 계십니까? 전자라면 앞으로도 하나님의 곁을 절대 떠나지 마십시오. 힘들 때도 있겠지요. 도망치고 싶을 때는 또 없겠습니까? 그래도 그곳에서 머물러 순종하며 사십시오. 만약 사래처럼 주님 곁을 떠나셨다면, 여러분이 계신 사막에서 돌아오십시오. 믿음의 자리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이스마엘의 출현입니다. 어려운 과정을 이겨낸 끝에 이스마엘이 태어나게 됩니다. 그는 장차 큰 민족의 조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아브람의 아들로서의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있지는 않았습니다. 아브람에게 기대하셨던 바는 아니지만, 그를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을 하나님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 생명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 태어나서 이 고생인가!’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이것만은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아름답고 좋은 미래를 준비하신 분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아브람과 사래가 믿음을 잃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 많던 예배는 사라지고, 눈에는 문제 거리만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자신이 자기 능력으로 해내고 말겠다는 자신감을 발견합니다. 그 결과는 심각했습니다. 가정이 깨지고, 하마터면 어렵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아브람은 애써 무시했고, 사래는 하갈이 도피해야 할 만큼 잔인하게 그를 괴롭혔습니다. 하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막상 도망을 쳤지만,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그곳에는 자신을 도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고통과 죽음, 배고픔과 절망이 존재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천사를 만납니다. 주님은 은혜로운 분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굶거나, 목마르거나, 사나운 짐승에게 쫓겨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한 하갈에게 갈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지금 해야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기회가 생기고, 삶의 방향과 목적을 알게 됩니다. 하갈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하갈은 살길을 얻었습니다. 다시 사래에게 돌아가 복종하며,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생각하며, 모든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래도 하나님은 꿈쩍하지 않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아브람 가정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대를 이어갈 자식 문제는 여전히 묵묵부답입니다. 16절을 보면,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얻을 때 나이가 86세였다고 기록합니다. 왜 그러시는 것일까요? 아브람과 사래, 하갈의 문제는 모두 기다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고, 자기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마침내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 자리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약속을 해 줍니다. 역시 언약입니다. 역시 믿음은 말씀을 믿고,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끝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참고, 바라고 믿고 견디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고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기다림은 길고 힘들지만,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그까짓 거, 어차피 내가 해봐야 잘되지도 않을 일!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을 꾸역꾸역 견뎌봅시다. 머지않아, 약속이 이루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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