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1~26절
창세기 4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가인과 그의 후손, 세 번째는 하나님이 아벨 대신 주신 셋이 등장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큰 묶음을 기준으로 오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16 가인과 아벨】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알고 있을 만큼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임신하여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와는 첫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가인(‘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지었습니다.
나중에 가인은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목자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은 얼굴빛이 확 달라진 가인을 달랬습니다. 「6.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7.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4:6-7)
하나님이 어떤 연유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예배자로서의 그의 삶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다시 거룩하게 설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에게는 분노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 자신에게 원인을 찾지 않고, 아벨에게 화가 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더 나은 제사를 드린 아벨과 자신을 비교하고,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혹시 오늘 예배를 실패해도, 내일이 있습니다. 혹시 삶에서 무너지거나, 절망감에 빠질 때라도, 내일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날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조금 더 성숙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나님은 그에게 ‘죄가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할 때,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간곡한 말씀에도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여 땅에 묻고 맙니다. 비교와 열등감은 감정과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아주 일부분을 제외하면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누리지 못했던 유익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행복한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더 넓은 집을 가진 사람, 더 좋은 자동차를 타는 사람, 더 많은 월급을 받는 직장, 외적으로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을 부러워하기 때문입니다. 비교는 순식간에 자신을 절망의 낭떠러지로 던져 버립니다. 우리는 정말 불행한 것일까요?
하 나님은 ‘죽은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고 가인을 나무라셨습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지은 죄로 인해 이미 저주를 받은 인간은 여기서 또 한번 저주를 받습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죄는 계속해서 사람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죄에게 지고 나면, 저주의 쓴 뿌리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이 죄의 악순환입니다. 이태원 참사의 원인은 결국 이런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즐기러 가는 것이 모두 죄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곳에서 즐기고 노는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을 벗어나 위험을 알리고 있음에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무서운 무감각이 그곳을 지배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이든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방관했던 국가조직이든지, 그리고 그런 문화를 자랑거리로 삼으려고 했던 이 시대의 물질 만능주의가 결국 희생자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죄는 항상 문앞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 죄를 다스리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라는 찬양처럼, 죄의 문제는 예수님의 도우심을 통해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들은 가인은 “이 형벌이 너무 무겁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가인을 보호해 주십니다. 어느 누구도 가인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그의 인생을 지켜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죄인이었던 가인을 하나님은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은 죄인일지라도 우리를 아끼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17~24 가인의 후손】
가인의 자녀들은 나중에 인류문명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성을 쌓고, 도시를 세우고, 각종 음악과 온갖 기구를 만들어내는 천재성을 발휘합니다. 그러면서도 죄악의 문제는 여전히 인류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리라는 기대는 오늘도 여전합니다. 많은 공부를 한 탁월한 이들이 아직도 인간 문명의 치부를 가리고 마는 모습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라멕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가 막힙니다. 고작 상처를 입혔는데, 상대방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24절을 보면,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라고 말합니다. 열 배, 백 배 갚아주겠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죄와 더불어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보십시오.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사회에도 죄가 없는 곳은 없고, 죄로 인해 신음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죄의 속성이 너무 가혹하고, 무지막지하기 때문입니다.
【25~26 셋의 탄생】
25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벨 대신에 다른 자녀를 주십니다. 가인은 살인자의 조상입니다. 아벨의 희생자였죠. 아벨은 온전한 예배를 드린, 온전한 삶을 산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죽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셋의 탄생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은 이제 셋을 통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살인자 가인까지도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길을 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길은 죄악의 길이 아니라, ‘예배의 회복’에 있습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아이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보십시오. ‘그때부터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아벨이 죽은 이후로 사라졌던 예배가 셋을 통해 시작된 것입니다. 가인의 살인으로 인해 무너졌던 생명의 전통이 예배를 통해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셋은 단순히 혼자만의 예배, 혼자만의 신앙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끄시기 위해 보낸 아들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셋이 그랬던 것처럼, 온 인류가 하나님께 나아오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회복할 수 있도록 온전한 길을 열어두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로 인해 고난 받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 파묻혀 죽으라고 방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 길이 있음을 가르쳐 주시고, 알려주시고, 그 길을 친히 만드시는 분입니다. 가인이 조금만 더 일찍 그 은혜를 알았더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죄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 죄를 이겨내야한다. 그 죄가 너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죄 가운데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지라도 새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새 길을 열어 우리에게 살 길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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