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이다. 예수님은 친절하고 은혜로운 주인이실 뿐 아니라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인격은 완전하고, 그분의 사랑은 무한하며, 그분의 능력은 비견할 데가 없으며, 그분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고, 그분의 선하심은 비할 데가 없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유익이요 영광이 된다.
로마 시대 때, 노예의 경험은 거의 전적으로 그 주인의 성품에 달려 있었다. 선하고 호의적인 주인의 노예는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으며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었다. 어느 역사학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로마 세계 이후의 노예 사회에서처럼, 로마 세계에서 노예의 물질적인 삶은 대체적으로 … 책무의 정도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주인은 자신이 노예에게 제공해야 할 물질적인 책무를 노예가 감당해 주는 책무에 따라 결정했다. … 따라서 가난한 자유민과 비교해 볼 때, 노예들은 종종 일정 부분 물질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에게 일정 수준의 물질이 제공되었기 때문에, 많은 경우 그들은 가난한 자유민들이 결코 알 수 없었던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신약시대의 노예들은 자신이 섬기던 주인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자신의 지위가 결정되었다. 그래서 “중요한 사람의 노예가 되면 그 노예 역시 일정 부분의 특권과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주인의 노예는 그 자체로 존경받는 위치였다. 노예들은 종종 자신의 주인의 이름을 묘비에 새겨넣었다.
로마의 노예들은 자기가 모시는 주인의 명성이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에, 자신을 자기가 모시는 주인과 관련시키기를 좋아했다. 심지어 묘비명에 새길 정도까지 말이다. 결국 “자신을 중요한 사람의 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호칭을 자기 자신과 다른 성도들에게 기꺼이 사용하는 것은 주인되시는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복종을 확증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과 관련된 존재가 됨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이 누리게 되는 특권과 지위를 선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자들은 노예라는 사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영광을 누릴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가족구성원으로서 그분과 관련되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로 구별되었다. 그분의 노예가 되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을 받아 보는 독자들에게, 자랑하려는 자는 주 안에서만 자랑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있었다.
존 맥아더, Slave, 국제제자훈련원, 95~100에서 발췌
Slave 8 - 마르틴 루터의 '노예의지론' (0) | 2024.08.07 |
---|---|
Slave 7- 어메이징 그레이스 '존 뉴턴(John Newton) 이야기' (0) | 2024.08.06 |
Slave 5 - 나의 주, 나의 하나님 (0) | 2024.08.03 |
Slave 4 - 위대한 종교개혁가, 위대한 순교자 얀 후스(Jan Hus) (0) | 2024.08.02 |
Slave 3 - 기독교 신앙에서 사라진 단어 (0) | 2024.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