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Jan Hus, 1372년?~1415년 7월 6일)는 1370년 보헤미아 지방 후시네츠(Husinec)의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후스는 사제가 되기를 소원했다. 사제가 되면 남부럽지 않은 삶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청년 때에는 프라하 대학에서 공부했고, 문학학사(1393), 신학학사(1394), 신학석사(1396)의 학위를 취득했다. 139년에 교수가 된 그는 1401년에 철학과 학장이, 1402년에는 대학 총장이 되었다. 이맘 때쯤 후스는 이전 세대의 위대한 영국 종교 개혁자였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저작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성경의 권위와 교황권의 부패를 바라보는 관점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안수를 받은 지 얼마 후, 프라하의 베들레헴 채플(Bethlehem Chapel)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라틴어가 아닌 보헤미아어로 설교했던 그는 시민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해졌지만,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나빠졌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프라하에서 면죄부 판매를 승인했을 때도 그는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에 당국은 칙령을 선포하여, 후스가 설교를 계속하는 한 시민들의 성찬을 금지하고, 교회 묘지에 묻히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시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저항의 강도를 누그러뜨린 후스는 1412년 은퇴하여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다. 그는 “교회란 모든 세대의 모든 예정된 성도들로 구성된다”고 가르쳤다. 이는 “교황의 교회의 머리이고, 추기경들이 교회의 몸”이라고 가르쳤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과 대조되는 것이었다. 후스는 자신의 책에서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보다 더 크다고 말했다. 얀 후스가 사형을 선고받은 주된 이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는 참된 권위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속해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시대의 부패한 사제들, 추기경들, 교황은 영적 리더십으로 합당하지 않다고 공공연히 비난했다.
1415년 7월 6일 아침. 당대의 가장 위대했던 설교자요, 교회역사상 가장 뛰어난 설교자였던 그가 재판장에 들어섰다. 이미 7개월 이상의 힘든 투옥생활을 견뎌냈다. 처음에 그는 하수도 근처의 어둡고 음울한 지하 감옥에 들어갔다. 너무나 고약한 냄새가 나는 곳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하게 앓았고, 감방을 옮기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몇 번 문초를 당했지만, 공개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진술할 합당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의 공식적인 소송절차는 단지 조롱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7월 6일 마지막 선고 공판을 위해 지역 대성당에 들어선 그는 성직자 옷과 성찬 잔을 들려주며 조롱하는 고소자들 사이에서 이단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수치심을 더하기 위해 입혔던 예복이 벗겨진 후, 그는 도시 외곽에 있는 사형 집행장소로 옮겨졌다. 사형집행자들은 목에 쇠사슬을 감고, 젖은 밧줄로 그의 몸을 말뚝에 묶였다. 불이 점화되었고,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이 죽음의 순간 그는 절망의 비명 대신 찬송을 불렀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그분 …” 이렇게 세 번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불꽃이 그를 덮쳤고, 그는 마음 속으로 기도하며 주님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 세기 이후에 이 놀라운 순교에 압도된 한 사람, 마틴 루터는 자신을 ‘작센의 후스’(Saxon Huss)라고 지칭할 정도로, 후스를 자신의 가장 위대한 멘토로 꼽았다.
존 맥아더, Slave, 국제제자훈련원, 59~67P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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