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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

QT하다

by 선한일꾼 2024. 2. 22.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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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15:34)”

 

성경은 거칠다. 매끄럽거나 부드럽지 않고, 결이 볼록볼록 살아있어서 다루기 힘든 나무같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었고, 가장 인기 있는 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매력이 없다. 뛰어난 명성과 소문 때문에 한 번쯤 집어들었던 사람들이 끝까지 읽지 못하고 내려놓는 것도, 평생을 경건하게 보내면서 나름 성실하게 읽거나 연구해 본 사람들도 '다 보았노라'고 자신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성경은 주인공을 미화하려 들지 않는다. 아름다운 모습, 매력적인 음성, 탁월한 매력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성경에 등장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지나치게 인간적이랄까? 아니면 불필요하게 적나라 하다고 해야 할까? 주름을 잡아도 될만한 인물의 인생을 살펴보면, 어딘가 엉성한 면이 있고, 부족하거나 덜되거나 악하거나 미련한 모양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후손들을 위해 살짝 덮어두어도 될만한 사건들을 자세히 기록하는가 하면, 만천하에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멍청하고 무모하고 무절제하고 탐욕적이며 이기적인 이야기를 기록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존경하는 인물일수록 그의 삶은 아름답고 덕스러운 이야기로 도배되기 쉽다. 그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이라면 부끄러워할 치욕적인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 자기 조상이나 가족 중에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감추거나 지우고 싶은 일을 성경은 자세하게 보여준다. 마치 너희가 존경하고 믿는 예수가 이런 존재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사렛 예수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그 고통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온 세상이 쩌렁거릴 정도로 크게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하고 외쳤다. 아버지는 외면하고, 아들은 외면하는 아버지를 목청껏 부른다. 정말 듣기 싫을 정도의 비명소리가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아들을 구하지 않고, 아들은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운명한다.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도, 그들의 지휘관인 백부장도, 그를 따랐던 여인들과 무서워 숨어 있던 몇몇 제자들도 초라한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일찍 배신을 때린 가룟 유다가 가장 현명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무기력하고 어리석은 죽음을 선택한 스승 대신 이번 달 중순에 돌아올 신용 카드 결제를 위한 현금을 선택했었다. 비록 그 선택을 후회하긴 했지만 말이다.

모든 사람이 숨어 있을 때, 용감하게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게 위로가 된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이 당연하다고 여긴 사람이 없었을텐데, 그 많은 구경꾼 중에서 예수를 위해 나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때 요셉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고려하지 않고, 그를 돕겠다고 나섰다. 비록 그를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지만, 죽은 그를 위해 장례를 치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는 부자였다. 부자라고 해서 돈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적은 돈에도 더 인색한 게 부자들이니까. 요셉은 자기가 가진 돈을 필요한 곳에 쓸 줄 아는 근사한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부자라고 해서 비난받는 건 옳지 않다. 요셉이 물질에 혈안이 된 존재가 아니었던 반면, 가룟 유다는 ’을 위해 스승을, ‘물질을 위해 정의를 버렸다.

나사렛 예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부자 요셉이 자신이 쓸 무덤을 예수께 양보한 덕분에 새 무덤에 묻힐 수 있게 되었다. 군인들도 보았고, 제자들도 보았고, 예수와 상관없었던 이들도 그것을 보았다. 눈에 불을 켜고 사막 지대를 휘젓고 다니는 들짐승이나,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의 위해를 막기 위해 무덤은 큰 돌로 막아 놓았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금요일 오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오후,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새벽까지) 나사렛 예수는 그곳에서 부활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하나인 그의 무덤은 그래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영화가 아닌, 가장 비극적이고 처참하게 그려냈다. 예수의 죽음이 그러했듯이, 예수의 부활도 주인공의 빛나는 귀환과 같은 화려함이 엿보이지 않는다. 성경은 여전히 오돌토돌하고 매끄럽지 못한 태도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쭉 담담하게 그려낸다. 만약, 만약에 내가 예수라면, 부활하자마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찾아갔을 것 같다. 고마우니까... 그런데 부활한 진짜 예수는 자신을 버리고, 배신하고, 저주했던 제자들을 찾아간다. 이 부분이 오늘 이야기의 절정이다. 나사렛 예수는 지금도, 그를 미워하고, 욕하고, 떠나고, 때로는 배신하거나 저주한 사람들을 찾는다. 지금도 어디선가 거칠고 매끄럽지 못한, 예수의 이야기가 씌여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내 바람으로선, 당신이 그 사람이면 좋겠다. 그렇다면, 언젠가 그를 만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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