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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 기도회

예화

by 선한일꾼 2025. 7. 14.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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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통일의 전기를 만든 동독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 기도회에 남겨진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한 사람의 시위대도 돌을 던지지 않았고 한 사람의 경찰도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늘 이야기합니다만(이 시위는 ‘비폭력(keine gewalt)’으로 유명함), 이 사건에도 중대한 위기는 있었습니다.

     시위대의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동독 경찰은 시위대의 다음 시위를 무력으로 진입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린 바 있었다고 합니다. 기도회 후 시위대가 교회 뜰을 지나 거리로 나오면서 거대한 군중과 합세하는 순간, 한 경찰이 무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한 성도가 땅에 엎드려 주기도문을 암송하기 시작하자, 주변 사람들이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위대를 막고 있던 경찰 중 몇 사람도 엎드려 주기도문을 암송하기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그리고 그들은 이내 하나가 되어 평화 시위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나라의 통치가 그 땅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 기도가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가요?

 

 

출처 : 이동원, 쉽게 풀어 쓴 마태의 천국이야기, 두란노, 49~50쪽에서 가져옴

 

 

<참고 기사> '성니콜라이 평화 기도회에 관한 기사'로 아이굿 뉴스,  평화기도회서 시작된 통일 불씨, 독일 전역으로 퍼지다 (2025-07-14 15:35 (월))에서 가져왔습니다.

     크리스토프 보네베르거 목사는 독일의 평화통일을 이끈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교회(St. Nikolai kirche)의 ‘월요 평화 기도회’를 이끌었던 중심 인물이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던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보네베르거 목사는 평화 기도회를 어떻게 이끌었을까.

     성니콜라이교회는 독일 중동부 상업도시인 라이프치히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1165년에 처음 건축되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유스투스 요나스부터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도 관련이 깊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한때 부목사를 맡았던 교회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이 교회가 독일 통일의 ‘불씨’였다는 사실이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평화 혁명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1982년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5시마다 성니콜라이교회에서는 ‘평화 기도회’가 열렸다. 평화 기도회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교회 입구에 기도제목을 적어 놓은 노란색 종이와 촛불을 놓았다.

     기도회를 담당했던 보네베르거 목사는 “니콜라이교회는 많은 동독 시민들을 보호해주는 장소였다”며 “교회 안에서 사회주의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대중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더 많은 분열을 일으키게 했고, 분열은 교회 밖에서 더 심화됐다. 그는 “폭력시위로 이어지던 중 우리는 비폭력을 지향하며 통일을 향한 평화기도를 하기 시작했다”며 “사회 분위기는 변화되기 시작했고, 이는 동독과 서독의 평화 통일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동독의 체제상 이들에 대한 비밀경찰의 감시는 날이 갈수록 심화됐다. 하지만 ‘교회’는 비교적 정권의 통제를 덜 받던 곳이었다. 또한 동독 교회를 지켜내려는 서독 교회의 지원, 유럽 사회의 평화를 위해 기도회를 연다는 명분과 동독 내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보장된다는 동독 정권의 대외 선적 때문에 ‘월요 평화 기도회’는 가능했다. 때문에 독일 통일 전 교회는 동독 내에서 탄압받던 재야인사들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89년 9월 4일 평화기도회가 열렸던 날에 대규모 거리 행진이 열렸다. 사람들은 평화기도회 후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 앞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시민들도 함께했다. 경찰의 강력한 경고에도 대중들은 더 몰려들었고 거리 행진을 시작했다. 약 1천명의 시민들이 ‘자유’를 외쳤다. 경찰의 무력진압이 시작됐고, 70명의 재야인사들이 체포됐다. 하지만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그 후 2개월은 동독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1주 후 9월 11일 월요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평화기도회가 ‘월요 시위’가 된 것이다. 비록 경찰의 체포와 강제 진압으로 그 다음주 월요일 9월 18일는 거리행진이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9월 25일, 평화기도회 후 성니콜라이교회 앞 광장에는 약 1만명의 시민들이 모였고,저항운동은 더 거세져 갔다. 그 다음주 10월 2일에는 2만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라이프치히 중심부 성니콜라이교회에서 시작된 ‘평화 기도회’는 당시 교파를 초월한 종교인사, 재야인사와 국민들이 함께 이뤄낸 민주주의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장벽 붕괴 한달 전 1989년 10월 9일, 평화 기도회 후 월요 시위에는 무려 7만명이 가담했다. 동독 시민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함께 손에 손을 잡고 거대한 원을 그렸다. 그리고 ‘비폭력(keine gewalt)’을 외쳤다. 작은 불씨는 커다란 불길이 되어 동독 전체로 번졌다. 자발적으로 폭력 자제를 요구하며 “자유”와 “자유선거”와 “정치범 석방”을 외쳤다. 무력으로 시위를 중단시키려 했던 동독 정부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운동의 승리였다. 10월 16일에는 동독 전역으로 확산됐고, 12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평화시위에 참여했다. 이날은 경찰이나 군인도 함께 참여했다.

     통일연구원 김영윤 선임연구위원은 “그날을 기억하는 독일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놀랍도록 평화로운 분위기였다’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실제 시위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 중 단 한 명도 돌을 들지 않았고, 경찰도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 평화기도회는 점점 확대되어 월요 시위로 이어졌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틀 후 동독 사회주의 권력의 중심점이었던 에리히 호네커 수상이 물러났다. 그는 재임기간 중 그토록 탄압했던 교회의 도움을 받아 동베를린 소재 소련야전병원으로 도피했다. 그 후 구소련 망명길에 올랐다. 그로부터 3주 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출처 : 아이굿뉴스(http://www.igood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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