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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무지개 속에 담긴 약속

창세기

by 선한일꾼 2024. 9. 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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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9:1~29

 

노아의 홍수가 지나고 세상은 다시 복원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서 자연은 스스로 왕성한 회복 능력을 가지고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시대마다 사람은 자기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자연을 마구잡이로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나무와 풀과 꽃과 열매, 바다의 물고기와 창공을 나는 새, 숲속의 크고 작은 동물들은 새롭게 세워진 땅과 하늘을 채워나갔습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복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복입니다. 그래서 시편 73:2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고백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전파하렵니다. 그러니 우리가 복 받기 위해 기도하고, 복 받기 위해 열심히 주의 일을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어떤 것보다, 먼저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드릴 음식을 분주히 준비하는 마르다에게 말씀을 듣는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마르다처럼 일도 하고, 봉사도 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선순위가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아들들에게 복을 주신 다음 그들에게 세상을 지키고 보존할 책임과 지위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먹거리를 푸른 채소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다만, 피는 먹지 말도록 금하셨습니다.

8절부터는 하나님이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언약, 즉 계약은 대등한 법적 당사자들이 체결하는 것입니다. 지위가 다르다면, 불공평한 계약이 되기 쉽겠죠. 그런 것은 계약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를 계약으로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과 같이 낮은 눈높이에서 우리를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절정은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일입니다.

 

12~13절을 읽겠습니다. 1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및 너희와 함께 있는 숨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언약의 표는, 13. 바로 무지개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가 될 것이다.

12절과 13절을 읽어보시니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적절한 계약처럼 보이십니까? 제가 보기엔 하나님께 훨씬 불리한 계약으로 보입니다만... 계약은 양당사자가 그 조약의 내용에 얽매이는 게 원칙입니다. 만약 지키지 않으면, 신용을 잃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노아나 그의 아들들 그 누구도 계약에 얽매일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만 계약에 얽히는 모양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아시기에, 사람에게는 무거운 의무조항 자체를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설사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다짐을 계약의 주요 내용으로 넣어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자격도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대가는 아들 예수님이 치르셨고, 모든 조건도 하나님이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구원의 사역을 감당할 자격도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아셨습니다.

18절부터는 방주에서 나와 농사를 짓는 노아와 가족 사이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제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땅이 스스로 먹을 것을 내어주지 않기에, 사람은 땀을 흘려야 하고, 수고와 노동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한 번은 노아가 술에 취해 잠이든 적이 있었습니다. 포도주에 어찌나 취했든지 벌거벗은 사실도 모르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함은 즉석에서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실수, 아버지가 술 취해 벌거벗은 채 잠든 모습을 본 그는 철없는 아이처럼 형제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기 위해 뒷걸음쳐 들어가 살며시 덮어 드렸습니다.

 

잠에서 깬 노아는 크게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저주가 등장합니다. 25~27절을 읽겠습니다. 25. 이렇게 말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장 천한 종이 되어서, 저의 형제들을 섬길 것이다." 26. 그는 또 말하였다. "셈의 주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셈은 가나안을 종으로 부릴 것이다. 27. 하나님이 야벳을 크게 일으키셔서, 셈의 장막에서 살게 하시고, 가나안은 종으로 삼아서, 셈을 섬기게 하실 것이다."

주일 예배때도 잠깐 언급했지만, 백인우월론자들은 이 구절을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0:6절을 보면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함의 자손들이 등장합니다. 함의 자손은 구스와 이집트와 리비아와 가나안이다.

 

함의 자손들은 아프리카 북부와 지금의 팔레스타인 주변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창세기 10:15~19절을 읽겠습니다. 15. 가나안은 맏아들 시돈을 낳고, 그 아래로, 헷과 16. 여부스와 아모리와 기르가스와 17. 히위와 알가와 신과 18. 아르왓과 스말과 하맛을 낳았다. 그 뒤에 가나안 족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19.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 그랄을 지나서, 멀리 가사에까지 이르렀고, 거기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서, 라사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함의 잘못을 왜 가나안이 뒤집어 썼는가하는 점입니다. 그 부분은 많은 견해가 있지만, 아마도 모세오경이 가진 특징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모세오경은 대부분 모세가 출애굽을 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 쓰여졌습니다.

이스라엘은 함의 자손이 이집트를 무너뜨리고, 함의 자손인 가나안으로 진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대상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노예로 주신 사람들이다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정작 함의 후예로 지목됐던 흑인들이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인간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면, 이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는 것은 그래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잘못된 목사, 잘못된 설교자, 잘못된 성경교사에게 배운 말씀이 아니라, 여러분이 직접 보고 읽고, 연구하고, 묻고, 깨달은 말씀이 없다면, 언제든지 이단과 악한 영의 도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잘못은 노아가 했는데, 왜 함의 자손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걸까요? 술을 먹고 부주의한 행동을 한 사람은 노아였습니다. 그런데 저주는 가나안이 받았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함의 잘못은 나무라면 되지만, 자신의 잘못은 보이지 않거든요. 위대한 믿음의 사람 노아도 이런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노아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아조차도 사랑하셨습니다. ! 그럼 하나님은 진정 가나안을 저주하셨나요? 맞습니다. 일정부분은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긴 구원의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셈의 정착지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떠나 함의 자손들이 사는 가나안으로 보내신 이유는 그들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진정 가나안을 저주하셨다면, 거기에 예수님을 보낼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가나안이라 불리는 땅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긍휼히 여기셨고, 그들을 위해 죽었습니다.

노아도 실수를 하는구나! 그런 노아 조차도 하나님은 소중하게 여기시는 구나! 노아는 이후로도 오래 살았습니다. 놀라실지도 모르지만, 노아가 죽은지 얼마되지 않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가 열립니다. 그만큼 신앙의 연대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부분에 계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고리가 축복의 고리가 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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