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1~32절
창세기 1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9절은 바벨탑 사건입니다. 10~23절은 셈의 계보(족보)입니다. 그리고 24~32절은 셈으로부터 시작한 계보가 아브람에 이르는 내용과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부분인 바벨탑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성경은 사람들이 한 언어를 사용했다고 기록합니다. 모두 같은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은 계보가 달라도 동질성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언어
오늘날도 지역감정은 있지만, 같은 언어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서로에게 긍정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 카타르는 개최국 최초로 예선 탈락하는 이변(?)을 낳았습니다. 그럼에도 카타르 월드컵은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했는데, 그 이유는 모로코가 준결승에 진출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문화권이라는 동질성이 이슬람권 국가들을 하나로 묶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같다, 같은 말을 사용한다’는 뜻은 그런 차원에서 단순한 의미를 넘어섭니다.
반대로, 같은 말을 써도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특히 부부들이 그렇죠. 평생을 같이 살아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잖아요^^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같은 말을 쓰는 같은 민족인데도 호남과 영남은 때때로 적대시할 때가 있기도 하죠. 이런 면에서 보면, 언어는 단순하게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노아의 후손이 셈과 함, 야벳의 자손들은 서로 같은 말을 사용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들이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서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쯤에서 3~4절을 읽겠습니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서로가 상대의 말뜻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3절과 4절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문제는 사회와 문화,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고 많은 사람이 모여 힘을 기르게 되자, 자신들의 일상에서 ‘하나님’을 제외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 직장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것처럼, 그들의 신앙은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그쳤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보다 ‘우리’, ‘나’, ‘우리의 이름’, ‘우리 가문의 명성’ 이런 종류의 단어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도시를 세우고, 탑을 쌓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는 말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자신들의 이름이 하늘에 닿게 한다는 점에서 이제 하늘은 누구나 오를 수 있는 만만한 장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높이 오르기만 하면 하나님처럼 될지도 모르니까요. 마치 과학이 발전을 거듭하면 언젠가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착각했던 과거의 인문주의자들처럼 말입니다. 과학과 사회가 발전하면 편안하고 안전한 사회가 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거나, 사람의 내면에 있는 본질적인 가치를 더 높여주지는 못합니다.
2. 도시
사람들이 모여 살면 편리한 것들이 많습니다. 무겁고 큰 돌이나 나무를 함께 옮길 수도 있고, 멀리 있는 물을 가까이 끌어올 수도 있습니다. 혼자 또는 가족끼리 음식을 먹는 것보다, 넓은 광장에서 풍성한 음식을 장만하고, 함께 나누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이런 모든 것들의 집합체가 도시입니다. 동시에 도시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생각이 모인 집합체입니다. 각자의 이익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이 도시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여 살았습니다. 모여 살면 누릴 수 있는 쾌락과 은밀하고 달콤한 죄악 거리들이 감춰지기도 하고, 합리화할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매년 서울광장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성소수자 축제’는 사실 서울이라는 도시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양평에 있는 시골 마을, 서너 집이 띄엄띄엄 있는 곳에서 그런 축제(?)가 열린다는 광고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도시는 익명성의 유익도 누릴 수도 있고, ‘부끄러움’을 이길만한 다수가 가진 뻔뻔함도 얼마든지 제공해 줍니다.
3. 하나님
5절을 읽겠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들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기 원하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건물이나, 모습은 뻔히 드러나는 것이니, 누구라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보신 것은 그 안에 담긴 내용물입니다. 도시와 탑에 담긴 내용물이 어떤지 보셨던 것입니다.
같은 공장에서 만들어낸 그릇도 사람들이 사용하기에 따라 다릅니다. 값비싼 자동차도 어떤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 장만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이들이 새로 출시된 딱지 모아두듯 보유(?)하기 위해 구입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만든 도시와 탑 안에는 자신들의 욕망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없고, 오직 자신만이 존재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사람 속에 악이 가득한 것처럼, 바벨탑 속에도, 도시 안에도 악이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을 잘못 읽으면 이런 뜻이 됩니다. “사람들이 이런 일을 시작했으니,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나도 위험하다” 물론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6절의 뒷 부분의 진정한 의미는 이런 뜻입니다. “이제 그들은 무슨 일이든 벌이고 말겠구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탑을 쌓아 올린 사람들의 교만이 앞으로 할 일은 자멸과 파탄밖에 없습니다. 도시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고, 번영과 풍요를 만든 사람들이 한 행동은 다른 민족을 학살하거나, 지구상에서 아예 사라지게 할 계획밖에 없었음을 인간의 역사는 증명합니다.
여러분!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인류는 정말 살기 좋아질까요? 실험실에서 인체의 일부를 채취해 장기를 만들면, 아픈 사람의 생명을 연장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선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유전자 복제며, 다양한 생명공학이라 불리는 최첨단 연구 결과들은 참담한 결과들을 낳고 있기도 합니다. 무슨 짓이든 하고야 마는 인간의 악한 생각과 계획을 하나님은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언어를 바꾸자 사람들은 흩어졌습니다.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오늘날은 인터넷으로 온 세계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 언어라는 장벽은 사라지고 있고, 구글번역기만 돌리면, 어느 나라 말이든 우리말로 번역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언어가 같아지는 이 시대가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AI가 발전한 오늘날은 세계 어느 말이든 즉석에서 번역해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편리한 세상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렇게 편리한 도구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 기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합의체를 만들고, 로봇이 할 수 있는 범위를 제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왜일까요? 지금의 편리함이 나중에는 인류를 공멸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성 때문에 컴퓨터와 AI, 로봇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인간보다 더 발전된 기술 문명이 필요 없는(?) 인간을 구별해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요 없는 인간이 처분 이외에 기계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4. 셈의 계보
인간의 역사가 계속되는 중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은 도시를 세우고, 탑을 높이 올리는 반면, 하나님은 가족을 선택하고, 생명을 잇게 하고, 믿음의 계보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의 나이를 숫자적으로 기록한 자료들에 의하면, 노아가 죽은 지 약 2년 만에 아브라함이 출생합니다. 신기하죠? 10~26절에 이르는 시기가 짧지 않은 기간임에도, 믿음의 연대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자손들, 셈의 자손들 그중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노아를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눈으로 보지는 못했더라도, 하나님의 이야기,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이곳저곳에 들려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이름모를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거죠.
5. 바벨로니아 우르를 떠나
31절을 읽겠습니다.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데라는 205년을 살았습니다. 수명이 많이 짧아졌죠. 그렇게 줄어들다 결국 20세기가 되자, 60세만 살아도 장수했다고 축하하면서 환갑이니 회갑이니 잔치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데라는 일흔 살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 이렇게 세 형제를 낳았습니다.
그중에서 데라의 아들 하란은 바벨로니아의 우르에서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데라는 우르를 떠나 다른 곳에 정착했고, 그곳 이름을 하란이라고 지었습니다. 나중에 정착한 곳의 이름이 죽은 아들의 이름으로 불린 걸 보면, 아버지 데라는 먼저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슬픔에 젖었을 것입니다.
그 후 아브람도 하란을 떠나죠? 창세기 12장에서 등장합니다. 그리고 하란에 남은 나홀의 가족들이 나중에 에서를 떠나 도망을 치는 아브람의 손자 야곱이 도망치는 외가입니다. 그곳에서 야곱은 이십여 년을 지내다가 다시 할아버지가 처음 정착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창세기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벨탑과 관련해서, 나홀은 문명이 가장 발달한 도시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 문명과는 거리가 먼 지역에 정착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하란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나아갑니다. 모두 문명과 도시, 사람들의 욕심과 야망이 집약된 곳을 떠나 광야로, 사막으로 떠나는 여정인 셈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자꾸 사막으로 몰아냅니다.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고, 불편한 잠을 자고, 깨끗하게 씻지 못하는 노마드의 삶을 가르쳐 줍니다. 건물을 짓고, 재물을 모으고, 땅을 넓혀가면서 사람을 착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철저하게 미래를 장담하지 못하는 세계로 나아가게 하시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가는 곳마다 생명을 위협 당하고, 먹거리를 걱정해야 하고, 자꾸 변하는 자연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광야 어느 길목에서 잠을 자던 야곱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꿈을 꿀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도시가 아닌, 하나님의 광야에서 오늘도 우리는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밤 번잡하고 시끄럽고, 정신 사나운 도시가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보여주시고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꿈을 꾸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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